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지금 여기 깨어있기 - 법륜
    리뷰/책 리뷰 2017. 1. 13. 03:21

    <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스님과 1:1 상담을 하는듯한 심정으로 읽은 책>



    지금 여기 깨어있기지금 여기 깨어있기



     몇 개월 전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한참 고민하며 여러 문제들로 둘러싸여 방황하고 있던 때가 있었다. 누가 되었건 길을 만들어줄 멘토가 시급했다. 그러던 차에 대구에 법륜 스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우연찮게 알게 되어 강연을 들으러 갔었다. 행복을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강연 주제는 '지금, 여기 행복하기'였다. 강연을 들으러 갔었을 때는 행복은 행복을 무작정 따라간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앎'에는 무지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곧 허물어질 모래성을 쌓는 일만 반복하는 꼴이었다. 



     강연 한 시간 전쯤부터 해서 자리에 앉아 과연 이것을 듣는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생각해보았다. 유투브 영상들로 먼저 법륜 스님을 접했던 터라 실제로 강연을 듣는다 한들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연을 직접 듣고 나니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법륜스님이 사람들의 문제를 대할 때의 목소리, 미묘한 표정변화, 질문자의 침묵 등은 동영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참석자들의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으로 점차 변해가는 흐름은 강연이 끝나고 무언가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강연을 듣고 나와 몇 일간은 그렇게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습관이란 것이 참 무서운 게, 배웠던 내용을 모두 잊고서 다시금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 잠시 머물렀다온 것이 마치 꿈과 같게 되어 (스님은 인생살이가 복잡한 까닭은 무지로 인한 번뇌 때문이라고  하신다좋은 잠자리에 든 사람이 밤새도록 악몽을 꾸면서 괴로워하는 것이 인생살이라는 것이다.) 책에 나오듯 '잠시 눈을 뜨고 깨어났는데 베개 들고 옆자리 가서 자는 꼴'이 되었다. 우리는 책에 나오듯 마치 바다에 파도가 일듯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늘 갖가지 느낌과 생각이 일어남을 그때그때 알아차려야 깨어있을 수 있다. 즉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시종 체험하겠다고 다짐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잠시 잊었던 내용을 다시금 복습하고 걱정과 고민을 덜어내 지는 것을 느꼈다. 강연을 한번 다녀와서 그런지, 책이 구어체로 적혀있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읽는 내내 법륜 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마치 상을 하나두고 마주앉아 가르침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렇듯 목소리가 들리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저절로 책을 읽는데 집중이 되었다. 많은 자기계발 서적과 행복에 대한 연구와 심리 관련 서적들을 보았으나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름다워보여 쥐었는데, 쥐고 나면 녹아 없어져버리고 마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형식과 관념과 결과론적인 말들은 녹아 없어져버리는 눈과도 같았다. 법륜 스님은 해탈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필요하면 형식도 차린다는 의미도 된다. 형식이 먼저가 아니란 뜻이다.) 형식을 본받아 흉내 낸다고 해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지인심-견성성불자기마음의 성품을 알면 곧 부처를 이룬다는 단도직입적 입장을 나타낸 말이다. 인생사는 복잡한 이론이나 많은 지식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자를 세워서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하여 불립문자라고도 한다. 자신이 체험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달음이라 할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얻어 가질 것이 본래 없는 까닭.' 이라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처럼 배워 쌓는다는 느낌의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관념의 세계를 뛰어 넘어야한다. 이것은 곧 생과 사의 관념조차도 뛰어 넘어 죽음 앞에서도 초연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를 빗대어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곤 하는데 이는 질문 자체가 관념적이기도 하고 강함의 기준이 결국 내가 세운 기준이므로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아집을 버리지 못했으니 질문하는 행위 자체로 더 나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점검하며 나아가다보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깨달음이라는 것조차도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한다. 즉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저런 질문을 하는 것도, 그것을 해결하고자 복잡한 문자로 풀어나가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관념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문제들은 (살아가고 있는 목적에 관한 질문,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등) 형식으로 접근했을 때 복잡해지는데 이는 단순하고 명쾌한 원리로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적 입장과 상반되는 것이다.

     


     사실 스님의 강연을 듣고 나서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그 계단위에 발 하나 올려놓았을 뿐 올라가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체가 정진의 관점에서는 내가 정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관념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무언가 발전이 있었다는 비유를 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나는 눈을 뜨지 못한 것 같다. 평소에 생각을 많이 했고 따라서 많은 것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것은 모두 남의 말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그저 외우고 있었을 뿐이며 그 조차도 관념과 형식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운 것을 복잡한 것으로 풀어나가려 하다 보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층을 오르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한 계단조차 올라가길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 조급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나는 깨달음에 있어서도 스트레스를 받을만큼 어리석은 것이다. 본인이 수행자의 길을 걷기위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다만 형식과 관념에, 아집에 속으면서도, 속는 줄을 아는 정도에 다다르고 싶을 뿐이다.

     


     책에 '있음과 없음을 가리는 차원을 벗어나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세계에 갔다가 돌아와 다만 있음과 없음에 대해 말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구절이 있다.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이 문장을 바꾸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 그대로 가져온 문장들이 몇 개 있다. 어쭙잖게 내 말로 바꾸는 순간 읽는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체는 접근하기에 어려운 개념이 아니지만 책을 덮고 난 뒤 자신에게 다른 세계에 살 수 있게 되었는가.’, ‘눈을 더 뜰 수 있게 되었는가.’ 묻는다면 결코 함부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하게 불교 관련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불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쉽게 읽힐 책인데도 거리낌(부담감)이 없었다. 여러 인용어구들이나 이야기들은 스님의 목소리처럼 조곤조곤 다가왔다. 포교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책이 그만큼 형식위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스운 것은 길이 이렇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걷고 있는 길 위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얼마 전까지는 내가 찾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었고 최근 들어서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 위를 걷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안타깝고 재미있고, 동시에 우스운 일이다.

Designed by Tistory.